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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클라스/My Favorite Art

<자화상 회화 연작>과 <금색 투구를 쓴 남자!> 렘브란트 Rembrandt

by 클래스는 영원하다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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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압주의!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의 자화상을 기록한 수많은 레퍼런스는 화가의 위대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평생을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아니면 인물연구와 더불어 가장 접하기 쉬운 대상이어서? 혹은 자신을 그린다는 것이 자신과의 깊은 대화와 몰입의 시간이라서일까? 모든 것은 렘브란트와 그의 무의식만이 알겠지만, 평생에 걸친 자화상을 모아놓고 보니 놀라울 따름이다. 사진분야에서는 인물 조명을 쏠 때 렘브란트 빛이라고 명명되는 대상을 45도 각도로 조명을 주고 반사광을 은은하게 만드는 기법도 있을만큼 렘브란트 자화상만의 특징들은 특별하다. 

 

렘브란트가 그린 수십 점의 자화상은 그의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 40점이 넘는 회화, 31점의 에칭  그리고 약 7점의 드로잉을 포함하여 거의 100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제작했다 . 일부 자화상은 주제(대부분 에칭) 또는 작가(대부분 회화)의 신원이나 초상화의 정의가 불분명하다

렘브란트 자화상_ 연대의 역순으로 배치함. 

1668-69,  자화상_갤러리아 델리 우피치  , 피렌체 1669_ 63세의 자화상_내셔널 갤러리, 런던 1669, 자화상_마우리츠 하이스 왕립미술관 , 헤이그

 

1665–69.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_켄우드 하우스 . 런던 1662경으로 추정, 제욱시스로서의 자화상_발라프리하르츠, 쾰른 1661, 사도바울로서의 자화상_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 암스테르담

 

가운데는 렘브란트가 왼쪽으로 돌아선 모습을 그린 두 점의 자화상 중 하나.

1660, 자화상_루브르박물관, 파리 1660, 자화상_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1659, 베레모와 칼라를 올린 자화상_워싱턴 D.C 국립미술관, 워싱턴

 

1658, 자화상_프릭콜렉션, 뉴욕 1655-1659?추정, 자화상_에딘버러 스코티시 국립미술관에 대여됨, 에든버러 1655, 호두위의 자화상, 빈 미술사 박물관, 빈

필자는 빈의 미술사박물관에서 여러 그레이트 명작 회화를 보았는데, 베르메르의 '회화의기술', 아르침볼도의 채소조합인물연작,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등장한 마르게리타공주 습작, 브뤼겔의 바벨탑 및 풍속화 시리즈 등...특히 이 우측의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더불어 두점이 있었는데, 말년의 기법이 농숙해 임파스토가 강력히 드러난 작품이 특히 인상깊었다. 이러한 렘브란트 자화상 및 인물 피부의 기법은 후에 루시언 프로이트나 재니샤빌처럼 인물화를 능숙하게 다루는 이들에게 현대적으로 재해석 되었고 그 계보를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래의 좌측 커다란 캔버스의 자화상 역시 그 깊이가 남달랐다. 

1655, 목걸이와 귀걸이가 달린 모피 소재의 렘브란트 자화상 1652, 자화상_빈 미술사 박물관. 빈 1645년, 자화상_카를스루에 미술관, 카를스루에



: 몇 년 만에 처음 선보이는 작품. 같은 해에 그린 드로잉처럼 렘브란트는 작업복을 입고 있지만, 모자는 아마도 쓰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시대적 양식과 초기 초상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빈의 미술사 박물관은 그의 회화를 열 점가량 소장하고 있는데, 어느 부부의 초상 한 쌍과 렘브란트 아들의 초상, 어머니의 초상 그리고 그의 자화상 석 점 등이 있다. 그 중 렘브란트의 이 자화상은 당시 그가 겪고 있던 고난과 고뇌,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화가로서의 길에 당당히 나아가고자하는 자신감과 굳건한 의지가 엿보이는 렘브란트 중년기의 대표적 자화상이다.1642년 아내와의 사별 직후 찾아온 개인적 비극과 경제적 난관은 말년까지 이어졌고 1656년엔 파산을 선고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가 소유했던 부동산과 스스로에 예술적 영감을 주었던 수많은 진귀한 소장품들을 내놓아야만 했는데 그 중엔 루벤스의 작품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이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 자화상을 그리던 46세의 렘브란트는 그가 겪었던 고난의 정점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렘브란트는 그러한 스스로의 처지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1642년 경의 아래 자화상 시리즈를 보면 사치스러움이 엿보였던 일전의 자화상과는 달리, 남루한 작업복 차림을 한 중년의 렘브란트는 노화된 스스로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그렸고, 그 얼굴에 조명을 비추었다. 또 두 손은 허리춤에 걸치고서 역경에 맞서고자하는 의지를 내보이듯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한 다른 자화상들 보다는 다소 큰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졌는데 이 또한 그 의지의 반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관람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자신의 여느 자화상보다도 강렬한데, 마치 마주한 역경을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그의 눈동자에 투영시킨 듯하다. 그가 서양미술사의 위대한 화가로서 그리고 네덜란드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으로 꼽히는 것은 이러한 의지와 그를 이처럼 예술로써 승화시켰기 때문이라<https://www.korean.at/24488/>

:1652년까지 마지막으로 그린 ​​자화상

1642, 자화상_로얄 컬렉션, 런던 1642-1643, 모자와 두 개의 사슬을 착용한 자화상_마드리드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마드리드 1640, 자화상_ 런던 국립미술관 ,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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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추정, 자화상 _루브르 박물관, 파리 1637년경. 검은 모자를 쓴 자화상_ 월리스 컬렉션, 런던 1636년경~1638, 자화상_패서디나 노턴 사이먼 박물관 .패서디나

 

:1세기 전 스타일의 의상을 입고 있다. 이 자세는 그의 1639년 에칭 작품과 티치아노의 초상화 <누비 소매를 한 남자>와 관련이 있다.

:성경 장면 위에 그려진 그림으로, 머리와 깃 부분만 렘브란트가 그린 것입니다.

1634년. 고제와 투구를 쓴 렘브란트의 초상_국립 미술관, 카셀 진위여부 논란 1635, 탕자와 사스키아의 "자화상"_ 드레스덴 알테 마이스터 미술관, 드레스덴. 1635년, 흰 깃털 모자를 쓴 자화상_ 데번주 버클랜드 수도원. 데번셔

:작품의 진위 여부는 의문시되고 있으며,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중:그의 아내 사스키아가 모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실제 인물의 신원은 불확실하다.

:전통적인 귀속 방식으로, 1968년에 거부되었다가 2013년에 반환되었다. 

1634년. 그늘진 눈을 한 자화상, 레이든컬렉션. 뉴욕 1634, 벨벳 베레모와 모피 망토를 두른 자화상_베를린 미술관, 베를린 1633년, 토크와 금사슬을 착용한 자화상_ 루브르 박물관, 파리

 

 

 

1632, 모자를 쓴 자화상_2005년부터 MCA  소유 1632.자화상_ 버렐 컬렉션, 글래스고 1631-1633, 푸들과 함께 있는 동양 의상을 입은 자화상 _프티팔레 미술관, 파리

 

중:렘브란트는 이 스타일의 유행 초상화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고향에서 제작된 마지막 자화상이자 유일한 전신 자화상입니다. 이국적인 의상과 넓은 배경은 이 초상화가 역사적임을 시사

 

1630, 자화상_리버풀 워커 미술관 1630, 베레모와 셔츠를 입은 렘브란트의 구리판 소형 자화상_스톡홀름 국립박물관,스톡홀름 1629,23세의 자화상_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 보스턴

 

: 리버풀 자화상은 표현 연구, 트로니, 그리고 전통적인 머리와 어깨의 '예술가 초상화' 사이의 과도기적 작품

:버나드 베렌슨은 이 그림을 "현존하는 가장 귀중한 그림 중 하나"라고 불렀습니다

1629, 레이스 칼라를 두른 자화상_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헤이그 1629년경, 고제를 쓴 자화상_뉘른베르크 독일 국립 박물관, 뉘른베르크 1629, 자화상_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클로우스의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그린 75점이 넘는 자화상 중 가장 초기 작품 중 하나이며, 아마도 실물 크기의 작품에 인물 얼굴의 특징을 정확하게 담아내려는 그의 첫 번째 시도였을 것입니다. 렘브란트가 겨우 23세였을 때 그려진 이 자화상은 베레모, 반짝이는 강철 목도리, 구겨진 실크 스카프, 그리고 얼굴 오른쪽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 자란 수염을 드러낸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울어진 머리와 벌어진 입은 화가가 마치 말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당황한 듯한 느낌을 주어, 그림에 매력적인 즉흥성을 더합니다. 이 그림은 한때 일본에서 유사한 그림을 모사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X-선 촬영 결과 머리와 어깨의 각도와 베레모의 위치에 조정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화가가 이전 작품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작업 과정에서 구도를 발전시켰음을 시사합니다. 알려진 다른 다섯 가지 버전의 작품과는 달리, 이 작품은 젖은 물감으로 서명되어 있어 진품임을 나타냅니다. 그는 라이덴에서 그린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노그램 RHL을 사용했습니다. 이 자화상의 사본 수는 이례적이어서, 그의 작업실에서 제자들을 위한 모델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었는데, 아마도 복잡한 조명 체계를 묘사하는 수업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629. 자화상_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 뮌헨 1628, 22세 때의 젊은 렘브란트_레이크스 박물관 ,암스테르담 1628, 구리판에 그려진 더욱 쾌활한 포즈. 렘브란트, 《웃는》, 2008년 재발견_J. 폴 게티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아래의 그림

1650년경 67.5cm × 50.7cm(26.6인치 × 20.0인치) 소장위치 Gemäldegalerie, 베를린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한다. 처음엔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알려졌고, 나 또한 그렇게 알고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자연주의에 가깝고 사심없는 능숙한 터치가 벨라스케즈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보인다. 그래서 자화상이 아니고 모델이 있어서 그런가 싶었는데, 이 모델은 렘브란트의 동생이며 렘브란트의 연습생들 중 하나가 그린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한다. 이 작품이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아닌 것으로 판정됐을 당시, " 여기에는 그림의 중성자를 활성화하여 진품 렘브란트의 그림과 비교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전문가들은 항상 옳지만, 황금 투구를 쓴 남자가 누구인지, 또는 그를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이 과연 알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라는 주석이 달렸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이 작품이 렘브란트가 전성기 시절에 매우 자연주의적 감각이 살아있을 때 그린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렘브란트의 작품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이 작품의 멋짐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렘브란트에게 사사받은 혹은 서당개 삼년으로 배운 누군가의 멋진 페인팅 능력은 투구의 화려함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그윽한 톤의 회색 빛 노장의 얼굴은 임파스토의 금색과 매우 적절한 대비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금색이 살짝 돋보이며 실제보다는 더 밝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만큼의 적절한 조화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보다 덜 한 빛이나 더한 빛은 이처럼 위대한 작품의 탄생이 불가하다고 단언한다. 

 

이 그림은 1969년 리프킨(Rifkin, 1969, p. 27)이 의심하기 전까지는 항상 렘브란트의 친필 작품으로 여겨졌습니다. 이후 키스 로버츠(Keith Roberts, 1976, p. 125), 크리스토퍼 브라운(Christopher Brown, 1979, Brown, 1979), 그리고 클라우스 그림(Claus Grimm, 1982, p. 250)은 렘브란트의 작품임을 부인했습니다. 1986년 베를린 게멜데갈레리(Gemäldegalerie Berlin)는 기술적 검토 끝에 이 그림이 렘브란트의 작품이 아니라 그의 동료 작가의 작품이라고 최종적으로 결론지었습니다(Kelch,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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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박 투구를 쓴 노인. B.-HdG. 356. 그는 약간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있으며, 눈은 아래로 처져 있다. 그는 자줏빛이 도는 붉은색 소매가 달린 어두운 코트를 입고 있다. 머리에는 귀마개와 짧은 흰색과 붉은색 깃털 장식이 달린 화려하게 세공된 금박 투구를 쓰고 있다. 어두운 배경. 강한 빛이 왼쪽 상단의 주석 투구에 비쳐 지나가면서 얼굴에 닿고, 가슴에 닿는다. 실물 크기, 반신. 모델은 렘브란트의 동생 아드리안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 살던 시절 라이덴에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었고, 게다가 아드리안 판 레인은 1652년에 사망했지만 이 모델은 1654년 그림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신원 확인은 쉽지 않다. 165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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