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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Artist

페기 구겐하임 Peggy Guggenheim

by 클래스는 영원하다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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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미국 필라델피아 태생으로 뉴욕에서 자란 페기는 타이타닉호의 침몰로 13살때 아버지 벤자민 구겐하임을 잃는다. 22세에 막대한 재산을(당시250만달러_현재 약3500만달러) 상속받은 페기는 미술에 대한 사랑과 열정 특유의 안목을 바탕으로 수많은 미술가들을 만나고 후원하며 콜렉션하였다.

베니스의 페기

너무나 가혹한 가족과 주변인들의 불운

어린시절부터 부유한 생활을 하던 그녀는 식탁에서 아버지의 내연녀의 존재를 언급했다가 혼쭐이 난 에피소드를 보아도 조숙하고 특별했다. 아버지의 외도와 관련해서 어머니에게도 큰 사랑을 받지 못한 페기는 훗날 회고에서 어머니를 혐오했다고까지 할 정도로 표현한다. 언니는 출산중에 죽게되고 동생의 자식들도 불운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두 번 결혼하였지만 자신의 가정 역시 순탄치 않았고 폭력과 외도로 두 번다 파국으로 끝냈다. 첫 남편과 낳은 첫아들은 페기를 멀리했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화가로 활동하던 딸 페긴 베일에게는 우회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딸도 다른가족들처럼 41세에 마약중독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다. 이런 상황을 일반인이 한 번만 겪었어도 처참하고 가혹한 것이었을텐데, 이모부와 외삼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두번째 남편은 간단한 수술을 하다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사망한다. 이러한 환경이 페기의 정신을 바닥까지 끌어내렸고 사랑에 목마른 상황을 만들었다고 본다. 

페기와 작가들

예술가들과의 관계 사랑 그리고 콜렉션

상속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페기는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 20대 초반에 미국의 서점 '선와이즈 턴'에서 일을하게 된 페기는 서점의 분위기를 사랑하였다. 서점으로 일컬어지지만 미국의 예술가 및 보헤미안들이 토론과 진취적 작업을 하는 _프랑스로 말하면 살롱과 같은 분위기를 갖고 있어 그녀의 예술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처음부터 안목이 높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즉흥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했던 콜렉션도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자신만의 취향과 안목이 발전하여 갖춰졌다.

파리에서의 페기

1920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면서부터 현대미술에 눈을 뜨기 시작하여, 몽파르나스의 카페를 중심으로 예술가들과 문인, 비평가들과 교류하며 전위적 경향에 대한 지식과 안목을 키워나갔다.  마르셀 뒤샹은 미술가들의 작업실이나 전시회에 페기를 데리고 다니며 페기의 안목을 높여주었고, 현대미술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주며 그녀를 이끌었다. 주로 다다 이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계열, 미래주의 등의 당시 힙한 작가들을 수집하였다. 프랜시스 피카비아, 만 레이, 콘스탄틴 브랑쿠시, 앙드레 브르통, 막스 에른스트 등과의 협업은 좀 더 안정된 작가군을 형성하며 콜렉션이 업그레이드 되었다. 막스 에른스트와는 결혼하였다. 페기는 수많은 남자들과 섹스중독자처럼 성행위를 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의 폼페이 동굴에 나온 에로스 벽화 속 성행위 체위를 모두 실험해봤다는 기록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사랑과 남자없이 세상이 무슨 재미인가?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다만 페기는 가장 행복했던 배우자는 영국 소설가인 존 홈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와의 사랑도 비극이 갈라놓았다. 손목 수술 후 홈스는 깨어나지 못하였다. 페기의 주변의 진실한 사랑들은 왜 그리 페기를 떠났을까? 

 

페기는 1938년 런던에 구겐하임 죈느(Jeune)라는 화랑을 열었다. 상업화랑이라고는 하지만 작품을 판매하기보다 자신이 생각한 예술성 높은 작가들을 소개해주는 역할을 더 많이 했다. 1941년 2차 세계대전을 피해 파리에서 미술관을 만들고자 했던 계획은 사라진다. 구겐하임은 남부로 피난갔다가 다시 유럽에서 뉴욕으로 와 금세기미술 화랑(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개관하고 유럽에서 수집한 미술품들을 미국에 선보였다.전쟁을 피해 작품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윌리엄 바지오츠, 알렉산더 칼더, 한스 호프만, 윌렘 드 쿠닝, 로버트 머더웰, 마크 로스코, 클리포드 스틸 등을 소개하였다. 특히 당시 삼촌이 짓고 있던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의 목수로 참여한 잭슨폴록의 그림을 발견하여 액션페인팅의 출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처음에 추상화 특히 폴록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지만, 몬드리안 등에게 조언을 받아 추상미술의 가능성에 대해 투자하게 되었다.

딸 페긴의 작품을 든 페기 구겐하임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프리다 칼로를 미국에 소개하며 리 클래스너, 도로시아 채닝 등 여성작가 31명을 소개하는 전시  The Women을 개최하며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자신의 딸 페긴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페기는 삼촌 솔로몬 구겐하임의 미술관에 자신이 콜렉션한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관장이던 힐라 레바이는 혹평을 하며 페기구겐하임을 내친다. '전쟁으로 이득을 본 장사꾼의 작품은 사양한다.' 라고 ... 전공을 하지 않은 페기구겐하임을 뉴욕의 대규모 미술관 관장이 받아줄리 만무했다.

베니스의 구겐하임 미술관 분관

 

현재의 미술관 내부와 당시 페기가 쓰던 저택_내부에 걸린 콜렉션들

 

1947년 페기는 금세기 미술 화랑을 접고 뉴욕을 떠나 이탈리아 베니스로 향했다. 자신의 콜렉션을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 그리스관에서 전시를 열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18세기 중반의 건축가 로렌초 보스체티가 설계한 베니스의 팔라초 베니에르 데이 레오니를 매입해 1979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30여 년간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사망 후 소장품들은 전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되었으며, 이후 베니스 저택은 구겐하임 미술관의 베니스 분관으로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The Peggy Guggenheim Museum'이라는 공식명칭을 얻어 운영되고 있다. 현재 구겐하임 미술관은 세계에 뉴욕, 베니스, 빌바오, 베를린 4군데에서 운영하며 현대미술의 걸작들을 소장하고 많은 관람객의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다.

 

페기 구겐하임의 삶과  예술가들과의 관계 후원하는 방식을 보면 예술가들을 어떻게 지켜주고 소개하고 후원해주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들이 있다. 물론 모두 같은 방식이 될 필요는 없지만 현재 체계화시키려는 사회적 예술 지원 시스템의 장단점에 대해 환기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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